4월2012

과거 대선결과로 본 대한민국의 지역주의

 

본 포스팅에서는 지역주의에 기반한 투표양상을 대선결과를 중심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설명의 대상은 최초로 영남출신 후보와 호남출신 후보가 맞붙었던 1971년부터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1997년의 대선까지이다. 이 기간의 데이터는 온라인을 통해서도 상세한 지역별 결과를 찾아내기가 힘들어 따로 문헌을 통해 정리하였다.

2003년부터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 퇴장 이후 지역주의가 이념의 분열로 모습을 바꾸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서 이에 대한 논의는 배제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보편화 된 시점이 1996~1997년 전후이며, 그 이후의 대선결과는 온라인을 통해 비교적 쉽게 자료를 입수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대선결과별 데이터 및 이에 관한 설명만을 제시하며, 각 결과에 대한 개인적 의견이나 평가는 시도하지 않았다. 일반론에 가까운 후미의 짧은 의견을 제외하고는 각 결과에 대해 규범적(normative) 논의가 아닌 실증적(positive) 자료만 제시한 것이다. 참고로 본인은 고향도 서울, 본적도 서울, 자란 곳도 서울(해외거주 기간 제외)이다.


 

1971년 대통령선거 – 박정희 vs 김대중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의 개헌으로 3선의 길을 열어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김대중은 1970년 신민당 경선에서 극적으로 김영삼을 누르고 야당의 후보로 대선에 뛰어들었다. 이 때 처음으로 영남 출신 대통령 후보(박정희)와 호남출신 대통령 후보(김대중)의 대결이 성사되었으며, 영·호남 지역주의가 태동하게 되었다. 김대중 후보는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는 것이었으며, 결과는 54% 대 46%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확정이었다. 이 때 박정희 대통령의 경상도 지역 득표율이 71.8%, 김대중 후보의 전라도 지역 득표율이 64.1%였으며, 인구가 많은 영남이 유리한 조건으로 박정희를 당선시킬 수 있었다.

 

1987년 대통령선거 – 노태우 vs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당하고, 1980년 전두환 장군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5.18과 김대중의 국외추방, 정치적 선동 등으로 영·호남의 감정적 불화가 커져갔다.

1987년,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인 노태우의 6.29선언 이후, 16년만에 실시된 대선 때에는 정치인들의 노골적인 지역감정의 표출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 때의 대선주자로는 경상북도 출신의 노태우와, 경상남도 출신의 김영삼, 국외추방에서 풀려나 정치에 복귀한 전라남도 출신의 김대중, 그리고 충청남도 출신의 김종필이 있었다. 이때의 선거는 인물과 정책의 대결이 아닌 지역 간의 대결로서 후보의 출신지역에 따른 선호도가 투표결과에 뚜렷하게 반영되었다. 야권은 표가 3개 지역으로 분산되면서 여당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었고, 결과는 36.7%를 득표한 노태우 후보의 당선이었다.

 

1992년 대통령선거 – 김영삼 vs 김대중 vs 정주영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김영삼은 유리한 고지에서 2년 후에 있을 대선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1992년 대선의 주요후보는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현대그룹을 창설한 정주영이었다. 정주영 후보는 강원도가 고향이고, 정치적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결국 이 선거도 영남과 호남 출신인 두 김씨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결과는 42%의 표를 얻은 김영삼 후보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33.8%로 낙선한 김대중 후보는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김영삼은 1993년 취임하여 1962년 윤보선 전 대통령 퇴진 이후 31년만의 민간출신 대통령으로서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1997년 대통령선거 – 이회창 vs 김대중 vs 이인제

1997년, 김대중은 정계복귀를 선언하며 야권의 대표주자로서 4번째로 대선에 도전하였다. 1992년의 선거가 3당 합당으로 여권 주자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면, 1997년의 경우는 여권 주자간의 분열로 야권이 이득을 본 경우라 할 수 있다. 여당(신한국당)의 경선후보였던 이인제는 이회창과의 경선에 불복한 뒤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출마하였으며, 이는 여권의 표를 분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IMF사태를 불러온 집권당의 정책실패와 김대중과 김종필·박태준의 연합은 김대중 후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회창과 이인제는 모두 충청도 출신이라 더 이상 영·호남 지역 간의 대결이라 말할 수 없었으나, 결과를 보면 지역주의의 연장선에서 당시 친여 성향의 영남과 김대중 후보의 지지기반인 호남 간의 투표성향 차이가 두드러짐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김대중 후보의 광주지역 97.3% 득표율은 선거사에 남을 기록이 되었다. 이 선거를 통해 김대중은 전국 40.3%의 득표율로 최초의 호남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짧은 의견

자국민간의 분열과 반목은 국가의 역량을 소진시키는 대표적인 병폐이다. 2002년 대선 이후 3김 시대는 막을 내렸으나, 지역주의는 좌·우 이념의 배로 갈아탄 채 여전히 한국 정치를 흔들고 국민을 분열시키고 있다.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지역주의가 이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모든 정치적 논의에 진영을 확인하도록 만든 뒤, 자기 진영에 대한 맹목적 옹호와 타 진영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에 있어서도 합리적인 경쟁은 국가를 발전시키지만, 우리의 모습은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비이성적이다. 사회분열의 수혜자는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우리의 경쟁국들이다. 남북이 반으로 갈라진 것도 부족해 동서로 분리된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민족의 에너지와 역량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정반합의 변증이 합에 이르지 못하는 증오의 정치가 이제 종식되기를 소망한다.